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비에트 궁전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1922년]] 12월 소비에트 대회 당시 회의 의장이었던 [[세르게이 키로프]]가 최초로 언급하였다. 그는 "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상징하는 궁전이 필요하다"고 강조했지만 이후 2년 동안 아무런 반응도 없다가 [[1924년]] [[블라디미르 레닌]]이 사망한 후 한 학생이 "꼭대기에 레닌의 동상을 짓자"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. [[1931년]] 2월 소련 정부는 공모전을 시작했다. 이 때 수많은 건축가들이 참여했는데 [[소련]]의 현지 건축가들은 물론, [[프랑스]]의 [[르 코르뷔지에]]부터 [[미국]]의 건축가까지도 있었다.[* 당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직 [[냉전]]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. 당시 소련과 미국은 사이가 그럭저럭 좋아서 미국의 [[크리스티 현가장치]]의 효시인 크리스티 전차를 수입해 [[BT 전차]]를 만들기도 했다.] 무려 15개의 도안이 제시되었는데 이 중에서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별 손색이 없는 매우 현대적인 디자인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자국민이었던 보리스 이오판이 선정되었다. 여기에 똑같이 자국민이었던 블라디미르 슈추코와 블라디미르 겔프라이흐가 동참하면서 새로운 도안에 들어가게 된다. 이 세 명은 한 조를 구성했으며 소위 "이오판-슈추코-겔프라이흐"로 불렸다. 소련 정부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세웠다. * 기둥형이며, 피라미드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취할 것. * [[에펠 탑]]만큼, 아니, 그보다 더 높게 지을 것. * [[낫과 망치]]를 새길 것. * 건물 앞에 [[블라디미르 레닌]], [[카를 마르크스]], [[프리드리히 엥겔스]] 등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정치가나 사상가 등 대표적인 거물들의 동상을 세울 것. 이오판-슈추코-겔프라이흐 조는 이에 맞춰 디자인을 하기 시작했으나, 첫판부터 스탈린에 의해 퇴짜를 맞는 등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. 처음에는 높이가 너무 낮다고 퇴짜를 맞는 좀 황당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 네 차례 수정한 끝에 최종 디자인이 완성되었다. 높이는 무려 '''415m'''이며 첨탑을 포함해서 '''495m''', 층수는 총 '''100층'''이었다. [[http://russiatrek.org/blog/history/moscow-palace-of-soviets-soviet-architectural-giant/|#]] 참고로 70여년 뒤에 지어진 롯데월드타워가 554m로 겨우 60m 차이인데 그나마 이 쪽은 높이만 높지 옆으로는 홀쭉하지만 소비에트 궁전의 압도적인 부피까지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건물. 심지어 2020년대 기준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[[마천루]]인 [[라흐타 센터]]는 높이가 460m라 소비에트 궁전보다 '''높이가 낮다.''' 참고로 라흐타 센터는 2020년 기준으로 유럽 대륙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다![* 물론 높이가 540m 인 [[오스탄키노 탑]]이 소련 시대에 건설되었지만 타워로 분류되기 때문에 마천루는 아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